국립 부경대학교

검색

커뮤니티

 

부경투데이

  • 국립 부경대학교의 다양한 모습과 소식을 접하시면 부경대학교가 한번 더 가까워집니다.
작성자,작성일,첨부파일,조회수로 작성된 표
어? 우리 학교 워커하우스에 이런 내력이!
작성자 대외협력과 작성일 2018-05-25
조회수 1156
작성자,작성일,첨부파일,조회수로 작성된 표
어? 우리 학교 워커하우스에 이런 내력이!
대외협력과 2018-05-25 1156



△ 워커하우스 관련 기사가 게재된 부산일보 지면.

부경대학교 ‘워커하우스’가 신문 지면에 크게 소개됐다.

워커하우스는 6.25 전쟁 당시 미 8군 사령부의 지휘본부였는데, 당시 사령관인 워커(Walton H. Walker)의 이름을 따 붙여진, 부경대에 있는 건물 명칭이다.

부산일보 기획시리즈 <피란수도에서 평화수도로> 여섯 번째 이야기가 바로 ‘미8군 사령부’, 즉 현 부경대 워커하우스였다.

이 신문은 24일 25면 전면 기사로 워커하우스의 내력을 소개했다.

기사 제목은 “‘낙동강 방어선’ 총 지휘본부, 연합군 반격의 전기 마련”이었다.

워커하우스는 부경대 대연캠퍼스 북측 중앙지점(쪽문 앞) 학교 울타리 가까이 위치해 있다. 이 공간은 현재 학생식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 1974년 워커하우스 전경(왼쪽)과 현재 워커하우스의 모습.

이날 부산일보 기사는 “한국전쟁 초기의 이 위급한 시기에 미 8군 사령부 및 유엔지상군사령부 지휘소로서, 낙동강 전선의 총 지휘본부 역할을 했던 곳이 현재 부경대학교 학생식당으로 사용되는 워커하우스(WALKER HOUSE)였던 것이다.”고 소개했다.

당시 어떤 전시 상황이었을까?

우선 이 워커하우스 건물 앞에 설치된 안내 표지판을 잠깐 보자. 부경대 이승영 교수(사학과)가 조사한 내용을 요약한 글이다.

표지판의 제목은 ‘가장 긴박했던 한국전쟁 18일 동안의 지휘본부’

‘이 건물은 6.25 전쟁 당시 미 8군 사령부의 지휘본부로서 사령관 워커(Walton H. Walker) 장군과 참모들이 머물렀던 역사의 현장이다.
1950년 9월 부산 방어권(Pusan Perimeter)은 거의 무너질 듯 아슬아슬한 위기를 맞고 있었다. 8군 참모들은 삼랑진과 마산을 잇는 데이비드슨 라인(Davidson Line)으로 후퇴하자는 논의까지 벌였으나 9월 4일 워커장군은 그 계획을 철회하였다. 그 대신 9월 6일 8군 사령부만을 대구에서 부산수산대학인 이곳으로 이동하였다(한국 전쟁을 기록한 역사서 「U.S Army in the Korean war」416페이지).
그 이유는 텔레타이프 통신장비를 보호하려는 데 있었다. 만일 그것이 파손되거나 적군의 수중에 떨어지면 극동지역에서 그러한 장비를 당장 구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워커 장군은 격전지에서 총탄세례를 받으면서 작전을 진두지휘했다고 한다. 워커 장군이 야전 지프를 몰면서 낙동강 전선을 미친듯이 누비고 다녔던 사실은 인구에 회자되는 일화다.
낙동강 방어선이 가장 위급했던 18일 동안 이곳은 전쟁의 지휘본부 역할을 했던 것이다.’

부산일보는 “(워커하우스) 이 건물이 그 역할을 담당했던 기간은 9월 6일부터 불과 18일 동안이었다.”면서, “왜냐하면 9월 15일, 연합군의 인천상륙 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면서 미 8군 사령부도 9월 24일 부산수산대에서 대구로 다시 이전해 갔기 때문이다.”고 밝혔다.

이어 기사는 “역으로 말하면 워커하우스의 연합군 수뇌부가 풍전등화의 위태로웠던 낙동강 전선을 18일 동안 잘 버텨주었기 때문에 인천상륙작전의 전기를 마련해 전쟁의 승기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워커하우스 18일’은 한국전쟁기 연합군 회생의 골든타임이었던 셈이다”고 평가했다.

부경대 서동철 대외협력과장은 이 기사에서 “워커하우스와 같은 상징적 공간은 스토리텔링의 자원으로서 잘 보존해 시민들이 찾아오는 시설물로 만들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부경투데이>

▷ 기사 전문 읽기 “클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