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 뵙고 싶었습니다 - 추진순 동문편(Interview | We wanted to meet you - Episode of alumna Choo jin-soon) | |||
작성자 | 대외협력과 | 작성일 | 2019-05-13 |
조회수 | 56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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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뵙고 싶었습니다 - 추진순 동문편(Interview | We wanted to meet you - Episode of alumna Choo jin-soon) | |||||
대외협력과 | 2019-05-13 | 560 | |||
“미치도록 공부하고 싶어요.” 부경대학교 전신 부산수산대를 1955년에 졸업한 추진순 동문(88세)의 말이다. 그는 지금 해양바이오신소재학과로 이름이 바뀐 증식학과에 1951년 입학했는데, 이는 당시 부산수산대의 두 번째 여학생 입학으로 기록된다. 5월 7일 부산 동래구 온천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추 동문은 미수(米壽)의 나이가 무색할 만큼 건강하고 유쾌하고 이지적인 인물이었다. 그와 자리한 3시간이 후다닥 지나갔을 정도로. 개교기념일을 맞아 박맹언 전 총장이 후배들에게 도움 되는 이야기가 많을 거라고 인터뷰를 추천해준 인물이 추 동문이었다. 아들과 딸을 각각 의사와 교수로 키워낼 정도로 당찬 삶을 살아온 그는 다시 대학생이 된다면 왜 열심히 공부하고 싶다고 했을까? 추 동문이 대학에 입학했던 1951년은 한국전쟁 중이었다. 그 때 부산수산대가 있던 현재의 대연캠퍼스는 정부에 징발당해 미군 야전병원으로 사용되었기에 학생들은 영도의 가교사에서 공부해야했다. 그는 “영도 가교사는 판잣집이었고, 책걸상은 좁았고 거기엔 도서관도 없었다. 우리 집이 있던 동래에서 영도까지 기차와 버스를 번갈아 타고 장시간에 걸쳐 등하교를 해야 했고, 어수선한 전쟁 통에 공부에 집중할 수 없었다.”고 당시를 돌이켰다. 그가 입학할 당시 부산수산대 전교생은 500여 명, 이 중에서 여학생은 고작 5명뿐이었단다. 1%다. 지금 부경대는 재학생이 16,326명이고 그 중에 여학생은 46.5%인 7,591명에 달한다고 하니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남학생들 틈바구니였지만, 화장실 말고는 크게 불편한 것은 없었단다. 그는 “남학생들은 매우 얌전하고 순수해서 부끄러워 말도 잘 걸어오지 못하더라. 그 때 우리는 동기생끼리 성씨에 형(兄)자를 붙여 호칭했는데, 남학생들은 나를 ‘추형’이라고 불렀다.”고 말했다. 조금 고풍스럽긴 하지만,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느껴지는 호칭으로 들린다. 그때 대학생 놀이문화는 어땠을까? 그는 “영도에서 가까운 남포동과 광복동이 무대였다. 동아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향촌다방에서 커피를 마시며 클래식을 들으며 수다를 떨었다. 멘델스존을 많이 들었고 펄벅을 즐겨 읽었다.”고 했다. 그는 “그렇지만 그 때 평생 하고 싶은 것을 찾았어야 했는데, 그걸 못 찾고 방황했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다시 대학생이 된다면 하고 싶은 공부를 미치도록 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고 말했다. 대학 졸업 후 전공을 살려 고교에서 생물교사로 5년 여 일했고, 그 후의 삶에서는 줄곧 내조와 자녀 양육에 헌신해온 그는 무슨 공부를 하고 싶었던 걸까? ‘원예 분야’였다. 동래여고를 졸업하기 전 3학년 말에 이미 그는 ‘씨 없는 수박’으로 유명한 우장춘 박사가 동래 온천장에서 운영하던 농업연구소에 취직했다고 했다. 그때 연구소 견학을 오던 대학생들을 보고 대학 진학을 결심하고, 고교 은사이기도 했던 향파 이주홍 교수의 권유로 부산수산대에 입학했던 것. 그 때 우장춘 박사와 맺은 원예와의 인연으로 식물 가꾸기가 평생 취미가 되어 그의 집에는 언제나 아름다운 식물들이 쑥쑥 자란고 한다. 지금도 충분히 아름다운 삶을 살고 있는 그가 그 때 원예를 깊이 공부했다면, 그는 지금과 다른 아름다움을 지닌 꽃으로 피었을 것이다. 어느 쪽이 맞는지 재는 것은 온당치 않다. 그래도 그는 가보지 못한 길이 못내 아쉬운가 보다. 후배들에게 한 말씀 부탁하자, 그는 “평생을 걸고 파고 들 수 있는 분야를 대학생활에서 찾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진정 즐겁고 행복한 일이라면 그것이 지금 인기 없는 분야라도 괜찮지 않겠는가?”라고 말했다.<부경투데이> ’If you go back to university life, what would you like to do?’ I asked but the unexpected answer came back. It is a word from Choo Jin-soon (88 years old), an alumna graduated Busan Fisheries University in 1955 (formerly Pukyong National University). She entered the Department of Proliferation in 1951, now renamed the Department of Marine Bio-Materials and Aquaculture which marks her admission to the second female student at Busan Fisheries University. On May 7, the alumna Ms.Choo, Whom I met at a cafe in Oncheon-dong, Dongnae-gu, Busan, was a healthy, pleasant, and intelligent person at the age of 88. Three hours with her have passed in a flash. On the anniversary of the opening ceremony, former president Park Maeng-un recommended Ms.Choo’s interview as a person who would give many stories to help her juniors. Why did she say she wanted to study hard when she became a college student who had lived a life to raise a son and a daughter as doctors and professors respectively? The year 1951, when Ms.Choo entered college, was during the Korean War. At that time, the current Daeyeon campus, where Busan Fisheries University was located, was taken to the government and used as a US military field hospital. Therefore, the students had to study at a temporary school building of Youngdo. She said, "Youngdo temporary school building was a shack, the bookshelf was narrow, and there was no library. I had to take the train and the bus alternately from Dongnae, where my house was located, to Youngdo for a long time, and I could not concentrate on studying in a messy war." I told that at the time of his admission, there were about 500 students at Busan Fisheries University, and only five students were female. It’s 1 % of now. At present, there are 16,326 students in Pukyong National University, and the number of female students reached 7,591, which is 46.5 %. She opened her eyes wide with surprise with the numbers of student. How about university play culture then? She said, "Nampo-dong and Gwangbok-dong, which are close to Youngdo, were the stage. I watched a movie at the Dong-a theater, drank coffee at a local coffee shop, and listened to classical music. I heard a lot of Mendelssohn and enjoyed reading Pearl Buck." She said, "But I should have found what I wanted to do at that time, but it was a time when I could not find it and wandered. So if I become a university student again, I would like to study madly that I want to do." After graduating from university, she worked five years as a biology teacher in high school, and in her later life, she has always been devoted to the care of her children as a mother. what did she want to study? It was a ’gardening field’. At the end of her third year before graduating from Dongnae Girls’ High School, she was said that Dr.U Jang-chun, famous for his "seedless watermelon", was employed at an agricultural research institute in Dongnae Spa. At that time, she decided to go to university to see college students who visited to the institute, and she entered the National Fisheries University of Busan with the recommendation of Professor Lee Joo-hong, who was her old teacher of the high school. At that time, with the connection with the gardening of Dr.U Jang-chun, the planting has become a hobby for her life, and the beautiful plants always grow in her house. She is still living a beautiful life now, what if she had studied horticulture deeply, she would have bloomed with a flower with a different beauty than now. It is not entirely proper to determine which is right. But she still misses the road that she has not tried to go. Asking her to say something to the school juniors, she said, "It is important to look for a lifelong field of study in university life. If I am really pleased and happy, would not it be okay even my major field of study is not popular now? "<Pukyong Toda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