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낯섦과 어떻게 대화할 것인가? | |||
작성자 | 대외협력과 | 작성일 | 2019-08-22 |
조회수 | 527 |
여행, 낯섦과 어떻게 대화할 것인가? | |||||
대외협력과 | 2019-08-22 | 527 |
부경대학교 인문한국플러스(HK+)사업단(단장 손동주)과 국제신문 공동기획 <동북아 바다…인문학으로 항해하다>의 31회 기사의 키워드는 ‘귀츨라프’였다. 부경대 이보고 교수(글로벌자율전공학부)는 8월 16일 국제신문 15면에 ‘서구인의 동아시아 바다 여행기’이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200여 년 전 동아시아의 바다로 왔던 ‘귀츨라프’라는 한 서양인을 소개했다. 이 교수에 따르면, 귀츨라프(독일·1803~1851년)는 선교사이자 관료, 지역 언어 전문가이자 ‘차이니스 레포지터리’라는, 광저우에서 발간(1832~1851)된 영문 잡지의 주요 필진이었다. 이 교수는 “(귀츨라프는) 문명과 기독교 전파자 역할을 자임하며, 주로 바다를 건너 많은 동아시아 국가의 현지인과 접촉하고 대화한 인물”이라면서, “그는 동아시아 해역을 세 차례 탐사했다. (중략) 조선에 발을 내디딘 흔적이 충남 보령 앞바다의 고대도(古代島)에 교회와 기념관으로 아직 남아 있다.”고 소개했다. 이 교수는 “(귀츨라프는) 1832년 7월 17일 장산에 도착한 뒤 22일 녹도 근해를 거쳐, 26일 고대도에 닻을 내린다. 그는 조선 관리를 통해 외국인으로서 처음 조선 국왕에게 정식 통상을 원하는 서한을 보내고 한문 성경을 비롯해 26종의 책과 서양 물품을 진상하도록 전달했다.”고 밝혔다. 이 교수에 따르면, 귀츨라프는 고대도에서 주민에게 한문 성경과 전도 문서, 서적과 약품을 나눠주고, 감자 재배법과 포도주 만드는 법도 전수했다고 한다. 또 주기도문의 한글 번역을 통해 한글 자음과 모음을 학습했다. 이 때 배운 한글 정보는 ‘차이니스 레포지터리’ 에 기고돼 유럽인에게 처음으로 전파되기도 했다는 것. 이 교수는 “그의 여행이 개인의 종교적 차원을 넘어 배후의 제국주의적 확장 욕망과 완전히 절연돼 있었다고도 말할 수 없다.”면서, “우리가 다시금 되새길 점은 귀츨라프가 중국 남방 양식 정크선에 싣고 항해했던, 한문으로 번역된 교리서가 상징하는 문화적 확장성.”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그는 대서양과 인도양, 말라카해협과 동남아 해역을 건너 동북아시아 바다까지 건너오면서 자신들의 콘텐츠를 현지 언어와 문화에 맞게 해 들여왔다. 그가 현지 복장을 즐겨 입고, 중국어는 물론 일본어나 조선어까지 상당한 수준으로 구사했다는 점은 여행자로서 본질, 즉 다른 문화와 대화 가능성에 대해 열린 자세와 자질을 갖추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는 바다를 가로지르는 문화 접촉 과정에서 발화자 위치에 맞는 훈련과 대화자의 태도를 유지했다.”고 소개했다. 이 교수는 “그가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가지고 있던 ‘중간지대·중간자’의 정체성은 아마도 우리가 지금도 꾸준히 마주하는 문화적 혼종이라는 낯섦과 어떻게 대화하며, 어떻게 같이 살아갈 것인지 되묻게 하는 거울.”이라고 강조했다.<부경투데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