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특별한 국 한 그릇에 대하여 | |||
작성자 | 대외협력과 | 작성일 | 2018-06-21 |
조회수 | 798 |
이 특별한 국 한 그릇에 대하여 | |||||
대외협력과 | 2018-06-21 | 798 |
우리에게 미역국은 어떤 음식일까? 부경대학교 사학과와 국제신문 공동기획 <해양문화의 명장면> 23회 이야기 소재는 ‘미역국’이었다. 20일 국제신문 21면에 실린 「상하귀천 구분 없이 모두가 즐긴 한민족 간편 보양식 ‘미역국’」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부경대 신명호 교수(사학과)는 미역국을 통해 해양문화의 명장면을 보여준다. 신 교수는 “예나 지금이나 한국인은 뜨끈하게 끓인 미역국에 밥 한술 말아 먹으면 속히 확 풀림을 느낀다.”면서, 조선 선비 이덕무가 중국에 가서 미역을 소개한 이야기부터 꺼냈다. 이덕무가 북경에 갔을 때, 우리가 요즘 해외여행 갈 때 고추장 가지고 가듯 그는 그 때 말린 미역을 가지고 갔다한다. 그런데 그 때 중국인들이 미역을 몰라보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덕무는 “조선의 산모는 기력을 보충하기 위해 으레 미역국과 쌀밥을 먹는다.”고 중국인들에게 설명해주었다고 한다. 산모가 미역국을 먹게 된 내력은? 신 교수는 이덕무가 당시 중국인들에게 소개한 말을 인용해 “옛날 어떤 어부가 새끼를 갓 낳은 어미고래에게 잡아먹혔다. 그가 고래 뱃속에서 보니 미역 잎이 고래의 위벽 여기저기에 붙어 있는데, 미역 잎이 붙은 위벽의 악혈(惡血)은 모두 물로 바뀌었다. 이를 본 그는 미역이 산후 특효약임을 알아챘다. 천만다행으로 고래 뱃속에서 나오게 된 그는 이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렸다.”는 것이다. 이덕무의 손자 이규경도 미역에 대한 일가견을 ‘산후계곽변증설’이라는 기록으로 남겼다고 한다. 신 교수는 “변증설에 의하면 조선의 산모는 미역국을 먹지만, 중국의 산모는 닭죽을 먹는다.”면서, “우리 조상도 중국 의학을 통해 산모에게 오골계가 좋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수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이유는 물론 이미 미역국이 산모 보양식으로 널리 쓰이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장면은 반구대 암각화다. 이어 신 교수는 “신라왕실의 식자재에는 미역을 비롯한 해산물이 적지 않았다. 통일신라시대 미역은 왕실을 비롯하여 귀족과 평민 나아가 어민에 이르기까지 전 국민이 애용하는 식자재가 되었다.”고 소개했다. 그는 “조선왕실의 경우, 왕비는 물론 후궁도 아이를 낳으면 미역국을 먹었다.”면서, “해산 직후 허한 기운을 채우고 신생아에게 필요한 젖을 풍부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고 말했다. 신 교수는 “조선 시대 왕은 가뭄, 홍수 같은 천재지변 또는 제사나 장례 같은 때 고기가 없는 음식을 먹었는데, 그것을 소선(素膳)이라 했다. 소선의 주재료는 조곽(早藿-올미역), 분곽(粉藿-좋은 미역), 곽이(藿耳-미역귀)에 더해 쌀이었다.”고 밝혔다. 미역이 주재료라는 것이다! 이능화의 ‘조선여속고’에도 미역이 등장한다. 신 교수는 “조선 시대 임신부가 있는 민가에서는 짚자리, 기저귀, 쌀, 미역을 장만해 놓고 기다리다 해산하면 미역국과 쌀밥을 마련했는데, 먼저 방의 서남쪽 구석을 정갈히 하고, 상에 미역국 세 종지와 쌀밥 세 종지를 차려 삼신께 제사한 뒤 산모가 미역국과 쌀밥을 먹었다고 한다. 미역국과 쌀밥에 삼신의 축복까지 추가해 산모의 기운을 북돋고 신생아의 만복을 기원했다. 예부터 한국의 어머니들은 미역국과 쌀밥 힘으로 아이를 낳고 길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했다. 신 교수는 “조선 시대 가장 많은 종류의 미역을 진상한 곳은 경상도였다. 경상도 미역 중에서도 단연 최고는 기장 미역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선사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한국의 어머니들은 왕실부터 어민에 이르기까지 상하귀천 구분 없이 모두가 미역국과 쌀밥 힘으로 아이를 날고 길렀다. 그러므로 예로부터 한국인을 낳고 기른 것은 미역국과 쌀밥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했다. <부경투데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