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는 바다를 모를 때 왔다 | |||
작성자 | 대외협력과 | 작성일 | 2019-05-24 |
조회수 | 447 |
위기는 바다를 모를 때 왔다 | |||||
대외협력과 | 2019-05-24 | 447 |
부경대학교 인문한국플러스(HK+)사업단(단장 손동주)과 국제신문 공동기획 <동북아 바다…인문학으로 항해하다>의 열여덟 번째 이야기 제목은 ‘위기는 바다를 모를 때 왔다’였다. 김윤미 부경대 HK 연구교수는 지난 5월 10일 국제신문 17면에 실린 이 글에서 “지난 역사를 되돌아볼 때, 위기는 바다를 알지 못했을 때 혹은 바다를 지키지 못했을 때 왔다.”면서 바다의 중요성을 환기했다. 김 교수는 “동북아는 제국주의 팽창의 마지막 목적지였다.”면서, “19세기 서구 국가들은 군함을 이끌고 새로운 바닷길을 따라 동북아 해역으로 몰려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선 해역은 중국, 일본, 영국, 프랑스, 러시아, 독일 등의 군함으로 둘러싸였다.”고 말했다. 그는 “1866년 9월 프랑스 함대가 조선을 침략했다. 조선에 통상을 요구하며 전쟁을 불사한 첫 이양선이었다.”면서, “프랑스는 조선이 천주교인을 박해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인도를 두고 영국과 싸우다 밀려나자 동북아에 관심을 돌린 것.”이라고 말했다, 병인양요였다. 김 교수는 “조선을 위협하는 정도에 그쳤지만, 그동안 프랑스는 조선의 수도인 서울로 들어가는 정확한 군사지도를 완성했다.”면서, “병인양요가 일어난 지 20여 년이 지난 1886년, 조선과 프랑스는 조불통상조약을 체결했다.”고 밝혔다. 그는 “프랑스의 침입 직전 1866년 8월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도 조선에 등장했다. (중략) 1871년 아시아 함대사령관 로저스를 조선으로 파견했다.”면서, “이 짧은 기간 미군은 조선에 해안측량 허가를 일방적으로 통고하고, 지세 정찰과 수로 탐사를 통해 지도 3장을 완성했다. 10여 년 뒤 1882년 조선과 미국은 조미수호통상조약을 맺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영국이 최초로 조선과 접촉한 것은 1797년 9월이었다. 영국 제독 브로우튼이 함대를 이끌고 북태평양을 탐험하던 중 동해로 진입한 것이다. (중략) 조선의 서남해안 일대를 항해하면서 동북아 해도를 완성했다.”면서, “조선과 영국은 1883년 조영수호통상조약을 맺었다.”고 밝혔다. 김 교수는 “일본은 일찍이 군함을 조선 연안에 파견해 불법 해안측량을 시작했다. (중략) 일본이 합법적으로 조선 해안을 조사하기 시작한 것은 1876년 강화도조약에 해안측량권을 명시한 이후였다.”면서, “일본은 조선의 바다와 육지에서 1884년 청일전쟁을 일으켰다. 청일전쟁 이후 조선 해안을 더욱 자유롭게 항해한 일본 해군은 1894년 조사보고서인 ‘조선수로지’를 발행하고, 1896년 해도인 ‘조선전안’을 간행했다.”고 소개했다. 그는 “청일전쟁에서 이긴 일본은 조선을 두고 러시아와 격전을 벌였다. 러·일 전쟁은 1905년 일본의 승리로 끝났고, 동북아 해역은 일본의 영향력 아래 오랫동안 놓였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