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중국을 통하지 않았다 | |||
작성자 | 대외협력과 | 작성일 | 2019-05-27 |
조회수 | 496 |
일본은 중국을 통하지 않았다 | |||||
대외협력과 | 2019-05-27 | 496 |
부경대학교 인문한국플러스(HK+)사업단(단장 손동주)과 국제신문 공동기획 <동북아 바다…인문학으로 항해하다>의 열아홉 번째 이야기는 ‘서양 지식은 어떻게 동북아에 유입됐나?’였다. 서광덕 부경대 HK 연구교수는 17일 국제신문 18면에 실린 이 글에서 “중국에 서양의 지식이 본격적으로 전래된 것은 16세기 후반 예수회 선교사들의 입국 이후라고 할 수 있다.”고 소개했다. 서 교수는 “이러한 예수회의 선교 전략은 기독교 전도의 측면과 서양 지식 보급이라는 측면에서 특징을 드러냈다.”면서, “서양의 신지식 특히 천문이나 역법과 같은 학문을 소개해 지식인들의 관심을 유도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여기서 1601년 예수회 선교사로서 최초로 베이징 거주를 허락받은, 유창한 중국어 실력을 보유했던 마테오 리치를 등장시킨다. 서 교수는 “(마테오 리치는) 죽을 때까지 베이징에 머물면서 ‘10가지 역설’ ‘유클리드의 기하원본’ ‘천주실의’ 등 다수의 책을 발표했다.”면서, “이미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와 같은 세계지도를 간행해 당시 중국 지식인에게 큰 영향을 주었던 마테오 리치는 중국어로 서학서를 써냄으로써 이후 동북아해역에서 근대 지식의 수용과 유통에도 큰 역할을 했다.”고 밝혔다. 그는 “이런 근대 지식의 수용은 당시 조공 시스템에 의해 유통이 원활했고, 동아시아 지역의 중세어에 해당하는 한자로 표기됐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고 강조했다. 서 교수는 “‘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가 16세기 이후 동북아해역에서 새로운 지식을 태동시키는 중요한 요소로 기능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조선에서 ‘실학’이 태동한 것과도 관련이 있다. 조공사절단을 통해 들어온 한역서학서가 18세기까지 서교(천주교)와 함께 전래돼 영향을 준 것이다.”고 짚었다. 일본은 어떻게 서양 지식을 처음 흡수했을까? 서 교수는 “일본은 일찍이 포르투갈과 직접적인 접촉으로 서구의 그리스도교와 과학지식을 받아들였다.”면서, “일본 역시 조선과 마찬가지로 중국에서 간행된 한역서학서를 통해 서양 지식을 수용하고 있었는데, 데지마의 교역을 계기로 네덜란드 상관과 통역사를 통해 직접 서양 의학과 과학기술을 수용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서 교수는 서양지식의 일본 유입에 난학(蘭學)의 역할을 강조했다. 에도 시대 네덜란드를 통해 들어온 유럽의 학문, 기술, 문화 등을 통칭해 ‘난학(蘭學)’이라 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난학 발달에 한 획을 그은 것은 1774년 의학자 스기타 겐파쿠가 번역한 ‘해체신서(解體新書)’”라면서, “‘해체신서’ 출간 뒤 서양 의학뿐 아니라 천문 지리 수학 병학 박물학 등 다양한 책이 일본어로 번역돼 서양의 새로운 지식이 일본으로 들어왔다.”고 했다. 서 교수는 “‘해체신서’가 일본 난학뿐 아니라 동아시아의 서양 지식의 수용에서 의미가 큰 것은 네덜란드어를 일본어로 번역한 최초 서적으로, 일본이 중국을 통한 서양 지식 전래에서 벗어나 서양인과 직접적인 접촉을 통해 자신의 언어로 번역한 점.”이면서, “궁극적으로 일본인이 서구에 대해 개방적인 인식을 갖고, 근대화를 추구할 수 있는 식견을 갖추는 계기가 됐다.”고 분석했다. 그는 “동시에 이러한 인식은 중화질서라고 하는 당시 동아시아의 지역질서에서 벗어나는 원심력으로 작동했다. 다시 말해 탈아(脫亞·아시아를 벗어남)의 이론적 또는 사유적 바탕이 난학을 통해 확보됐다고도 할 수 있다.”고 말했다.<부경투데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