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유학자들의 호기심 부족이 초래한 것 | |||
작성자 | 대외협력과 | 작성일 | 2019-07-12 |
조회수 | 494 |
조선 유학자들의 호기심 부족이 초래한 것 | |||||
대외협력과 | 2019-07-12 | 494 |
부경대학교 인문한국플러스(HK+)사업단(단장 손동주)과 국제신문 공동기획 <동북아 바다…인문학으로 항해하다>의 26회 기사 키워드는 ‘서학’이었다. 서광덕 부경대 HK 연구교수는 ‘동북아해역과 근대 지식의 수용·유통(하)’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조선에서의 서학 도입에 대해 소개했다. 서 교수는 “16세기에 서구의 대항해시대가 열렸고, 이로 인해 서양인의 배가 명을 중심으로 한 조공·해금체제가 흔들리던 동아시아 해역에 도달했다.”면서, “동아시아 해역이 세계 규모의 시장과 연결되는 동시에 하나의 중심이 되었다. 다양한 문물의 수용과 유통도 활발해졌다.”고 말했다. 그는 “이 변화는 특히 중화문명권에서 늘 변방에 위치해 있던 일본으로 하여금 중국 일변도의 문화 유입이라는 상황을 바꾸게 했다.”고 밝혔다. 조선의 경우는 어떠했을까? 서 교수는 “동서양 해상의 무역을 바탕으로 한 이처럼 큰 이동과 교류의 시대를 조선은 당시 중국으로 간 조공사절단을 통해서 맞이했다. 소위 조선의 서학 수용은 예전처럼 단지 중국을 경유해서 이루어졌던 셈.”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이렇게 들어온 서학은 조선에서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17세기 중엽 청나라가 건국한 뒤 청의 선진 문물을 수용해 조선을 개혁하자는 주장을 펼친 북학(청학)이 등장했다.”면서, “ 북학이나 실학은 모두 중국을 배우는 학문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중국을 통한 서구 학문의 수용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그런데 두 학문은 서구를 특화시켜 일반화하지 못한 채 서학을 단지 조선의 개혁을 위한 또 하나의 중국 신학문으로 받아들였다.”면서, “이 점은 18세기 조선 근대화의 한계라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고 개탄했다. 서 교수는 “사실 서학은 천문 역법 지리 의학 종교 및 자연과학에 이르기까지 범위는 대단히 넓다. 그런데 실학자들조차도 종래의 유학 곧 성리학을 상대화하는데 중국에서 들여온 서학의 일부를 사용했을 뿐 자연과학과 기술 분야에 해당하는 서학에는 눈이 가지 않았다.”고 말하고, “당시 조선 유학자들은 다양한 사물에 대한 호기심이 대체로 부족했던 듯하다.”고 분석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