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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뵙고 싶었습니다 - 류청로 동문편(We wanted to meet you - Episode of Alumnus Ryu Cheong-ro)
작성자 대외협력과 작성일 2019-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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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뵙고 싶었습니다 - 류청로 동문편(We wanted to meet you - Episode of Alumnus Ryu Cheong-ro)
대외협력과 2019-06-19 936

죄송한 표현이지만, 그에게는 ‘개구쟁이’ 같은 면모가 있었다. 류청로 (사)이주홍문학재단 이사장(67세) 말이다.  


△ 향파 이주홍 흉상 옆에 선 류청로 동문. ⓒ사진 이성재(홍보팀)
지난 5일 부산 동래구 온천1동에 있는 ‘이주홍문학관’ 회의실에서 류 이사장을 만났는데, 그는 시종일관 천진한 미소와 꾸밈없는 이야기로 상대방을 편안하게 하는 넓은 품이 있었다.
 
부경투데이가 그를 만난 것은 그가 부경대 동문(어로학과 70학번)이고, 또 이주홍문학재단 이사장으로서 지난 5월 열린 이주홍문학축전을 성황리에 이끈 장본인이기도 해서, 이참에 부경투데이 독자들에게 ‘이주홍(1906~1987)’에 대한 이야기를 펼쳐보고 싶어서였다. 

한국 문화예술계의 큰 봉우리, 이주홍도 부경인이다. 이주홍은 1949년부터 부경대 전신인 부산수산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1987년 작고할 때까지 40년 가까이 후학을 양성했다.
 
우리나라 아동문학의 선구자로 꼽히는 이주홍은 소설뿐만 아니라 시 수필 희곡 동시 동화 번역 문인화 등 문학의 다양한 장르에 걸쳐 왕성한 활동으로 한국 문학사에 큰 업적을 남겼다. 대한민국 문화훈장, 대한민국 예술원상, 부산시문화상 등을 수상했다.

류청로 이사장은 “제가 이주홍 선생님 마지막 제자 세대죠. 1970년 1학년 때 이주홍 선생님이 강의하신 국어수업을 들었어요. A학점을 받은 것은 국어와 철학뿐이었지요.”라고 말했다.

그만큼 그는 이주홍을 좋아하고 따랐다. 그 때의 특별한 시간으로 인해 문학청년 류청로는 50여년 후 이주홍문학재단의 이사장이 됐다.

이주홍은 그 당시 어떤 교수였을까?


△ 향파 이주홍.
류 이사장은 “이주홍 선생님은 ‘수대학보’와 학예지 ‘백경’ 등 정기간행물은 물론 ‘백경극회’ ‘해양문학회’ 등 연극과 문학 동아리, 미술 서예 동아리에 이르기까지 학생들의 문예능력을 일깨우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 자상하고 열정적으로 이끌어주셨다.”고 학창시절을 돌이켰다.

류 이사장도 그 때 문학청년이었다. 그는 “해양문학회와 연극부인 백경극예술연구회에 가입해 ‘모비딕’ ‘탈선 춘향전’ 등 수많은 무대를 이주홍 선생님과 같이했다. 선생님이 계셨기에, 인문대학도 없던 부산수산대 학생들이 왜 연극이나 문학에 열심인지에 대해서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류 이사장은 “이주홍 선생님은 거칠고 가난하고 열정과 패기만 가득 찬 무법자 같은 수산대 학생들을 그대로 인정하고 관조자의 입장을 지켜주었던 좋은 선생님이었다. 선생님 자신이 문학의 모든 분야, 서화, 출판, 연극에 이르기까지 탁월한 재능을 몸소 학생들에게 보여주면서 전파하는 모습은 아무나 흉내 내기 어려운 것이었다.”고 회고했다.

이주홍의 호는 향파(向破)이다. 깨뜨림을 지향한다는 뜻일까?

류 이사장이 대학 4학년 때였다. 낯선 외국 항구에서 돌아다니며 술 마시며 놀았던 이야기(배 실습기가 아니라)를 원양승선실습기로 학교 신문에 연재했는데 이 때문에 대학본부로부터 징계를 당할 뻔했다고 한다. 그는 “그 때 이주홍 교수님이 ‘젊은이니까 그럴 수도 있다’며 두둔해주셔서 징계를 면했다는 사실을 학교 졸업 한참 지난 후에 알았다.”고 말했다.

류 이사장은 부경대 해양공학과에서 후학을 양성하다 2018년 2월 정년퇴임한 동문 교수다.

그는 “젊은이들은 그래야한다고 생각한다. ‘바른 길’로 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른 길’로 가는 것도 필요하다. 향파는 그런 무법자 같은 청춘을 무언으로 응원하고 지지하셨던 분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스스로를 향파가 마련한 무대를 마음껏 누리고 즐긴 무법자였다고 했다. 그는 “해양문학회에서 시 소설 희곡을, 연극부에서 연출과 희곡을 손질하면서 대금연주로 연극 음향을 담당하기도 하면서 향파 선생님이 만들어 놓은 마르지 않는 예술의 샘터에서 실컷 즐기고 놀았던 거 같다.”고 말했다.

그 당시 향파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부산 동래구 온천1동에 있는 ‘이주홍문학관’에 소개된 향파를 잠시 들여다보자.


△ 젊은 시절의 이주홍.
향파는 1925년 <신소년>에 동화 ‘배암색기의 무도(舞跳)’를 발표하고, 이어 1929년에는 <조선일보>에 단편소설 ‘가난한 사랑’이 입선되면서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했다.

그는 동시집, 동화집, 시집, 소설집, 소년 장편소설집, 수필집, 시나리오 희곡집에 이르기까지 무려 200여권의 저서를 남겼다. 한국 근대문학사에서 여러 영역에 걸쳐 이처럼 방대하고도 뛰어난 작품을 남긴 대가는 향파 말고는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특히 향파는 최초의 출판미술가로서 정현웅과 더불어 한국 근대문학사의 대표적인 잡지와 작품집의 표지그림과 꾸밈새를 맡았다. <신소년> <별나라>를 비롯한 잡지에 그려진 강렬한 표지그림은 한국 근대문학의 됨됨이를 넓고도 정확하게 내면화시켜 커다란 공을 세웠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림과 글씨도 뛰어났다. 단아하면서도 활달한 향파의 서예, 섬세하면서도 선비의 품격을 잃지 않은 다채로운 그림은 전통 문인화를 근대 서화와 접목시킨 독자적인 세계를 이루었다. 향파는 1934년도 <조선일보>에 연재한 ‘똑둑이의 설노리’를 비롯해 많은 만화를 그렸고, 해학과 풍자가 넘치는 본격적인 문인만화 시대는 향파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평가된다.


△ 이주홍의 작품 ’석류꽃’


△ 박물관(오른쪽)과 옛 학생회관 ’백경회관’의 현판. 이주홍이 선생이 직접 쓴 글자로 만든 것이다. 

류 이사장은 “오늘날 이주홍 기념사업의 모태는 1980년에 이주홍 선생님의 제자들이 결성했던 ‘이주홍아동문학상 운영위원회’”라면서, “그 제자들이 바로 부경대 총장을 지낸 강남주, 부산문화방송 사장을 역임한 김영, 우리나라 대표적인 해양과학자이신 허형택 같은 분들.”이라고 말했다.

향파의 흔적은 부경대에도 많다. 부경대 종합강의동 이름은 이주홍의 호를 따서 향파관, 그 건물 앞에는 향파문학비도 있다. 그리고 그 뒤편으로 ‘향파문학의 거리’가 조성되어 있다.

류 이사장은 “향파는 부경대의 소중한 자산이다. 오늘날에 향파를 더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그의 문학정신을 배우고 또 다시 후대에 길이 전하는 일을 부경대와 함께 힘을 합쳐 해나가고 싶다.”고 했다. 그는 “특히 해양인문학의 창시자가 바로 향파였다. 그런 점에서 해양인문학의 본거지가 바로 부경대가 되어야한다. 그런 노력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류 이사장에게 후배들에게 한 말씀을 부탁했더니 이런 답이 돌아왔다.

“향파는 중졸이었다. 그는 스스로 배워서 대문호가 됐다. 향파의 삶은 스스로 배우는 삶이었다.”면서, “어렵다고 좌절하지 말자.”고 말했다.

궁금했다. ‘개구쟁이’의 꿈은 무엇일까? 그는 이렇게 답했다.

“대학시절, 선장되는 것이 꿈이었다. 배가 침몰한 뒤 선장은 없고 선장실에 한 뭉치 원고로 발견되고 싶은 꿈이었다. 선장이 되지는 못했지만, 원고 뭉치는 남기고 싶다. 누구도, 무엇도 의식하지 않고 자유롭게 쓴 원고 뭉치를 남기고 싶다. 해양소설이 될 것이다.” <부경투데이>



△ 부경대 향파관(왼쪽 건물)과 그 앞에 선 향파문학비.

△ 부경대 대연캠퍼스와 맞닿은 향파문학거리.

"Feel tired? Think about the self-educated Hyangpa, who became one of the greatest Korean writers.
Interview with Ryu Cheong-ro Alumnus, the head director of Lee Ju-hong Foundation for Literature Corp.

Sorry to say, but he had a 'mischievous boy' aspect inside. I mean, Ryu Cheong-ro (67yr old), the board president of the Lee Ju-hong Foundation for Literature Corporation.

On June 5, I met Mr.Ryu in the meeting room of 'Lee Ju-hong Literary House' in Oncheon 1dong, Dongrae-gu, Busan, and he had a wide arms of comforts that made me relaxed with his ingenuous smile and blunt talk.
 
Pukyong Today met him because he is the alumnus of Pukyong National University (enrolled in 1970, Dept. of Fisheries) and as the chairman of the Lee Ju-hong Literature Foundation, he led the Lee Ju-hong Literature Festival on June 5 to success, this was because I wanted to open a story about 'Lee Ju-hong (1906~1987) to the readers of Pukyong Today.

The big peaks of Korean culture and arts industry, Lee Ju-hong is also Pukyung people. Lee Ju-hong has been a professor at National Fisheries University in Pusan (Present Pukyong National University) since 1949 and trained younger students for about 40 years until his death in 1987.

Lee Ju-hong, one of the pioneers of children's literature in Korea, has made great achievements in the history of Korean literature with his vigorous activities in various genres of literature, including novels, poetry, play, children's poem, children's story, translated books, literaty paintings. He won the Korean Culture Medal, the Korean Art Award, and the Busan City Culture Award.

"I am Lee Ju-hong's last disciple generation. I attended Korean language classes taught by Professor Lee Ju-hong during my first year in university in 1970. It was only Korean and philosophy that I received an A grade." said Mr.Ryu.

He liked and followed Lee Ju-hong so much. Due to the special time of that time, Ryu Cheong-ro, a literary youth, became chairman of the Lee Ju-hong Literature Foundation 50 years later.

What kind of professor was Lee Ju-hong at that time?

"Lee Ju-hong is not only a regular publisher such as 'School newspaper of Fisheries university' and a academic journal "Baek-kyong", but also a variety of activities such as 'Baek-kyong Drama society', 'Maritime Literature Society' and other literary circles and art calligraphy clubs, he was very enthusiastic and enthusiastic about whatever it took to awaken his students' literary skills." Mr.Ryu reminisced to me.

Ryu was also a literary youth at that time. He said, "I participated in the Maritime Literature Society and the drama society, Baek-kyong Drama Literature Study Group, and participated in many plays such as' Moby Dick', 'The life of deviated Chun-Hyang' and so on. Since there was our teacher, nobody raised objections to why Busan Fisheries National University students, who had no College of Liberal Arts, were so passionate about play or literature."

"Lee Ju-hong was a good teacher who admitted the students who were wild and poor, full of enthusiasm and passion, like the outlaws, and kept the viewpoint of the observant. It was difficult for anyone to imitate the preaching of his talents to students in all fields of literature, paintings and calligraphic works, publishing, and plays." said Mr.Ryu, looked back on the past.

Lee Ju-hong's pseudonym is Hyangpa (向破). Does it mean to break down?

When Mr.Ryu was in the fourth grade of University. The story he had been drinking and drinking in a foreign harbor (not the story about practice shipboarding) was serialized in a school newspaper as a story of ocean fishing shipboard training, and he was almost disciplined by the university headquarters. Mr.Ryu said, "I realized that I was able to avoid the discipline at that time because there was Lee Ju-hong, a professor who understands and tells 'Because you are young, you may be able to do that.'"

Mr.Ryu is an alumnus professor who fostered students in Department of Ocean Engineering and retired in February 2018.

He said, "I think young people should do that. It is important to go to the right road, but it is also necessary to go to the other road. He was the one who cheered and supported the youth like the outlaws."

He called himself an outlaw, enjoying the stage set by Hyangpa. He said, "At the Maritime Literature Society, I have played poetry drama, playing and directing dramas in the drama circle, playing the drama sound with playing Korean flute, and playing and enjoying it at the fountain of art.", he said.

What kind of person was Hyangpa at that time? Let's take a moment to look at the introduction to 'Lee Ju-hong Literary House' in Oncheon 1dong, Dongrae-gu, Busan.

In 1925, Hyangpa published a fairy tale 'Dance (舞跳) of Young snake' in <Sinsonyeon>, and in 1929, a short novel 'Poor Love' was awarded to the Chosun Ilbo.

He has written about 200 books, including children's poem books, fairy tale books, poetry books, novels, novels for Juvenile, essays and plays. The great writer such a vast and magnificent work in various fields in Korean modern literary history is hard to find except for Hyangpa.
 
In particular, Hyangpa was the first publishing artist, along with Jeong Hyun-woong, as well as cover paintings and embellishments of representative magazines and works of Korean modern literary history. The paintings of intense signs drawn in magazines such as <Sinsonyeon> <Byeolnara> are evaluated as having made a great achievement by internalizing Korean modern literature widely and accurately.

The picture and the text were also excellent. Simple yet energetic calligraphy of Hyangpa, the colorful paintings, which are delicate yet without losing the elegance of the monks, have formed a unique world that combines traditional ink painting with modern paintings. Hyangpa has drawn many cartoons, including 'Ddock-Doogi eui Seol-nori' in the <Chosun Ilbo> in 1934, and it is estimated that the era of comics, which is cartoon of literary person with full of humor and satire, originated from Hyangpa.

Mr.Ryu said, "Today, the birthplace of the Lee Ju-hong Memorial Project is the 'Lee Ju-hong Children's Literature Prize Management Committee' formed by the students of Lee Ju-hong in 1980." and he added, "The disciples served as the President of Pukyong National University, Kim Young, a representative marine scientist in Korea, like Huh Hyung-taek."

The traces of Hyangpa are also found in Pukyong National University. Pukyong National University's General lecture complex, Hyangpa building is named after Lee Ju-hong, and there is also a Hyangpa's Literature Stone in front of the building. Behind it, there is a 'Alley of Hyangpa's Literature'.

Mr.Ryu said, "Hyangpa is a valuable asset of Pukyong National University. Today, I would like to continue to work with Pukyong National University to remember Hyangpa more people, to learn his literary spirit and to pass on the road to future generations." and added, "The founder of marine humanities in particular, was Hyangpa. In that respect, the headquarters of marine humanities should be Pukyong National University. We should do that."

I asked Mr.Ryu to say something to his university juniors and the answer came back.

"Hyangpa was a middle school graduate. He learned for himself and became a great writer." and, "Hyangpa's life was a life of self-learning" he said. "Do not be frustrated."

I was curious. What is the dream of a 'mischievous boy'? He replied like this.

"During my university life, it was my dream to become a captain. After the ship had sunk, there was no captain, and it was a dream to be discovered as a bunch of manuscripts in the captain's office. Although I did not become a captain, but I want to leave a bunch of manuscripts. I want to leave a bunch of manuscripts written freely, without anyone being aware of anything. It will become a marine novel." <Pukyong To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