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니가타에 깃든 사연 | |||
작성자 | 대외협력과 | 작성일 | 2019-07-05 |
조회수 | 499 |
일본 니가타에 깃든 사연 | |||||
대외협력과 | 2019-07-05 | 499 |
부경대학교 인문한국플러스(HK+)사업단(단장 손동주)과 국제신문 공동기획 <동북아 바다…인문학으로 항해하다>의 25회 기사 제목은 ‘일본 니가타항 탐방기’였다. 이 글의 필자인 김윤미 부경대 HK 연구교수는 “바닷길을 통하면 동북아는 하나다”면서, “환동해권에는 한국, 북한, 중국, 러시아, 일본이 있다. 그리고 숱한 역사의 기억을 간직한 항구가 있다.”고 일본 니가타항을 소개했다. 김 교수는 “니가타는 2019년을 개항 150주년으로 기념하고 있다. (그래서) 올해 니가타는 볼거리, 먹거리, 즐길거리가 한가득이다.”라고 썼다. 그는 “니가타는 에도 시대 중반부터 일본 해안을 따라 교역한 북전선(北前船)의 항구였다. 교역품은 대부분 쌀이었다. (중략) 연어와 송어를 잡으러 북태평양으로 향하던 어선의 출항지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1930~40년대 니가타항은 번영의 시기였다.”고 말했다. 그는 “니가타항은 1935년 일본 정부의 니가타-청진·나진·웅기 명령항로로 지정되었다. 이 항로는 일본 도쿄와 만주 신경(新京·지금의 창춘)을 연결하는 최단 거리였다. 1932년 만주국을 세운 일본은 만주의 자원과 식량을 일본으로 이송하고, 일본의 사람과 생산가공품을 만주로 운송하려고 했다. 니가타항에 물자가 모이면서 인구가 급증했고, 상업과 공업이 성장했다.”고 소개했다. 그는 “1941년 12월 일본이 하와이를 침공하고 아시아태평양전쟁이 시작됐다. 일본 정부는 태평양 방면의 공장을 니가타로 옮겼다.”면서, “1945년 일본이 패전한 후, 만주와 조선에 살고 있던 많은 일본인이 니가타항으로 귀환했다.”고도 했다. 김 교수는 “니가타는 한국인의 아픈 역사를 간직한 곳이기도 하다.”면서, “발전소 건설이 한창이던 1922년 7월 건설 노동자로 있던 한국인들이 탈출을 시도하다 수십 명이 학살되는 사건이 있었다. (중략) 1959년부터 1984년까지 일본에 살고 있던 한국인들이 니가타항에서 북한으로 가는 북송선을 탔다.”고 밝혔다. 그는 “니가타는 1964년 큰 재앙을 겪고 다시 일어난 곳이다. 인근 바다에서 진도 7.5 규모의 지진이 발생하면서 도시의 모든 것이 사라졌다. (중략) 큰 재해를 입은 니가타는 1967년 다시 일어서는 계기를 맞았다. 일본 정부가 국제해상수송망의 거점 역할을 하는 특정 중요 항만으로 지정한 것이다. 1969년 신항만이 건설되면서 니가타는 국제무역항으로서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환동해권에 있는 국가와 지방정부는 공동의 바다에서 함께 번영하기를 꿈꾼다.”면서, “희망찬 미래를 논의하는 자리에서 갈등의 바다를 어떻게 풀어나갈지 지혜를 발휘해야 하는 시점이다.”고 글을 맺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