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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뵙고 싶었습니다 - 조일환 동문편(Interview | We wanted to meet you - Episode of Alumnus Jo Il-hwan)
작성자 대외협력과 작성일 2019-07-09
조회수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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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뵙고 싶었습니다 - 조일환 동문편(Interview | We wanted to meet you - Episode of Alumnus Jo Il-hwan)
대외협력과 2019-07-09 1947


 
그는 우리나라 공무원인데 뉴욕주 변호사 자격증이 있고, 지구촌 경제협력을 이끄는 경제개발협력기구(OECD)의 수산위원회 부의장으로 활약 중이기도 하다.

바로 부경대학교 조일환 동문(사진) 이야기다. 해양수산부 어업정책과장인 그는 지금은 해양바이오신소재학과로 이름이 바뀐 부경대학교 양식학과 89학번이다.

그는 어떻게 이 자리까지 왔을까? 그의 삶에서 힌트를 얻고 싶은 후배들을 위해, 부경투데이가 그와 E-mail을 주고받으며 인터뷰를 했다. 

사실 그는 매우 바쁜 사람이어서 이런 소소한 인터뷰(그 자신에게 그다지 큰 감동이 없을)는 성가신 일임이 분명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후배들을 위해서!”라는 부경투데이의 요청에 금쪽같은 시간을 할애해 주었다.(‘후배들을 위해서’ 라고 하면, 왜 그 많은 동문들은 금방 무너지던지^^) 

그는 “사실 현재 제 모습은 대학 1학년 때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라고 운을 뗐다.

그는 “대학 입학 후 현재까지 약 30년을 되돌아보면, 초지일관 목표를 향해 달려갔다기보다는 그 때 그 때 상황에 따라 목표를 변경하며 살아온 삶인 것 같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이것이 인생이 가진 멋진 측면이라고 생각된다.”고 했다.

조 동문은 “스티브 잡스가 스탠퍼드대 졸업식에 얘기한 것처럼, 나중에 뒤돌아보니 과거의 순간들이 다 연결되어 의미를 가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현재는 과거의 총화! 지금 그대의 이 순간(무엇을 하는 순간!)이 그대의 미래가 된다는 말이겠다. 
   
그의 대학 생활은 어땠을까?

조 동문은 “대학 4년을 학교 부설 양어장에서 말 그대로 일하며 살았다.”고 했다. 이 양어장은 지금도 학교 정문 옆 대숲 뒤편에 있는 그 양어장을 말한다.

그는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지만, 그 당시만 해도 학생들이 전적으로 양어장 시설을 관리하고 물고기들을 키웠는데 그 일이 만만치 않았다.”면서, “양어장 일과 학업을 병행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오히려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을 소중히 여기게 된 좋은 계기가 된 것 같다.”고 돌이켰다. (이 긍정적인 마인드!)

조 동문은 “여유가 없어 다른 동아리 활동도 하지 못했지만, 그 때 축적된 경험과 인내심, 김인배, 조재윤 교수님 및 여러 선후배와의 끈끈한 관계는 인생을 살아가는데 돈독한 자산이 되고 있다.”고도 했다.  

양어장에서 그렇게 열심히 일하던 그는 어떻게 공무원이 되었을까?

조 동문은 “원래 학업을 계속해서 학교에 남거나 연구소에 가고 싶었다. 하지만 우선 경제적으로 독립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어서 취업준비를 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주위에 공무원을 권유하는 분들도 있었지만 많은 분들이 그러하듯 공무원은 고리타분하다는 선입견이 있었고, 사기업은 왠지 끌리지가 않아서 공기업에 취업하는 것으로 방향을 정했다.”고 말했다.

그래서 때마침 농촌진흥공사가 농어촌진흥공사로 이름을 바꾸면서 수산직을 5명 선발했고, 그 중 1명으로 입사했다고 한다.

그는 거기서 주로 전남지역의 어촌종합개발계획을 수립하는 일을 했다. 그런데 일을 하면서 공무원들이 의사결정 단계에서 좀 더 위에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당시 이왕이면 자신이 생각했던 것들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좀 더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싶었다. 마침 기술고등고시 수산직 시험이 있다는 사실을 안 그는 농어촌공사에 다니면서 시험을 준비했는데, 그의 표현을 빌면 “운 좋게 합격했다.”고 한다.

그는 직장이 안정되고 나니 미뤄둔 공부를 더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해양수산부에서 처음 배치된 부서는 해양환경과였다.

그는 “해양환경분야는 다소 생소했지만 상당히 흥미로운 분야였다.”면서, “그래서 해양환경 쪽으로 더 공부할 수 있는 학교를 찾다가 미국 듀크대 환경대학원에 대해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듀크대 환경대학원에 해양환경 전공으로 입학한 후  GIS와 인공위성을 이용한 원격탐사분야에 흥미를 느껴 환경생태학으로 변경했다.

이쯤에서 독자들은 그의 삶을 변화시킨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영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미국 듀크대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한 그는 2001년 해양수산부에 복귀한다.

그는 “그 때 당연히 해양환경과에 배치될 것이라고 생각했다.”면서, “하지만 당시 WTO 도하개발아젠다 협상이 한창 이슈가 되던 때였고, 영어를 하는 직원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무역진흥과에 배치되어 WTO 협상업무를 담당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이 순간이 그의 삶의 변곡점 중의 하나다.

그는 “막상 해보니 무역협상도 재미있는 업무였다.”고 말했다. 그는 거의 매달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WTO 본부에 가서 협상에 참여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을 알게 된다. 외국 협상단, 특히 영미권 협상대표들 중에는 법을 전공한 사람이 많다는 점이었다.

그는 “그 당시 왠지 법을 전공한 사람들의 말이 좀 더 논리적이고 설득력이 있다고 느꼈다. 무역협상 업무를 제대로 하려면 나도 법을 공부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2004년 다시 미국 인디애나대 로스쿨로 유학을 가게 된다. 이 로스쿨이 미국 로스쿨 중 가장 체계적인 중국법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선택했다고 한다. 그는 “정작 가서는 중국법을 공부하지 않았지만, 이때부터 중국을 좀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영어로, 그것도 처음 접하는 법학을 공부해야했던 조 동문의 로스쿨 3년을 어땠을까?

그는 “매우 힘든 과정이었다.”면서, “법학에 대한 사전지식이나 경험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영어로 법학을 공부했다는 것이 지금 생각해 봐도 무슨 배짱이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고 회상했다. 지난 일이니 이렇게 몇 줄로 거칠게 요약되지만, 지독한 인내와 각고의 노력이 아니었으면 어떻게 그걸 해낼 수 있었겠는가?
 
그 숱한 난관을 헤치고 그는 법무박사, JD(Doctor of Jurisprudence) 학위를 받았다. 미국은 로스쿨을 졸업하면 다른 주의 변호사시험에도 응시할 수 있다. 그래서 내친걸음에 그는 뉴욕주 변호사 자격증도 취득했다.

2007년 귀국한 이후 그는 한동안 WTO, FTA 등과 관련된 통상업무를 하다가 수산정책 업무를 했다. 2013년에는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 들어가서 수산분야 국정과제를 수립하는 업무도 했다.   

공직생활을 하다보면 해외 주재관을 나갈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 그는 미국 주재관을 나가고 싶었다고 한다. 하지만 석사와 박사를 모두 미국에서 했는데 주재관까지 미국을 다녀오면 너무 한 쪽에 치우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고, 한창 G2로 떠오르는 중국을 좀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중국어를 공부하고 2013년 하반기에 중국 주재관으로 나가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한국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대륙의 미세먼지 때문에 고생은 좀 했지만, 중국 생활도 좋은 경험이 되었다. 특히 우리나라와 비슷하면서도 많이 다른 중국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가치관을 알게 된 것은 큰 소득이라고 생각된다.”고 말했다.

그런 조 동문은 지난 2018년 11월, OECD 수산위원회 부위원장이 됐다.

부경대는 해양수산경영학부 박성쾌 교수(2000~2002년), 이상고 교수(2008~2011년)가 이 위원회 부의장으로 활약한 바 있다.

조 동문은 OECD와 어떻게 인연을 맺었을까?

그는 “약 10여 년 전에 부경대 이상고 교수님이 OECD 수산위원회 부의장으로 활동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저도 기회가 되면 꼭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면서, “2018년에 마침내 기회가 되어 OECD 수산위원회 부의장이 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OECD 수산위원회에 대해서는 WTO 협상업무를 하면서 알게 되었다고 한다. OECD는 세계 각국의 데이터를 수집‧분석해서 보고서를 쓰는, 일종의 정책 브레인 역할을 한다. WTO 수산분야 협상에서도 OECD의 보고서가 주요 논거로 활용된다는 것이다.

현재 그가 부의장으로 활약하고 있는 OECD 수산위원회의 이슈는 무얼까?

그는 “수산보조금이 수산자원에 미치는 영향, 불법어업 예방과 해양경제(Blue Economy) 등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했다. 이 수산위원회의 부의장인 그는 의장과 함께 이러한 논의의 방향을 사전에 조율하고 이끌어가는 것이 그의 역할이다.

그는 “OECD 회의에 참여하는 것은 선진국의 경험과 정책에 대해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고, OECD에서 논의되는 정책들은 우리나라 수산업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면서, “따라서 OECD 수산위원회 부의장으로 활동하게 된 것은 개인적으로도 큰 영광이고 국가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일이라 생각된다.”고 말했다. 

이런 활동을 하려면 영어가 필수다. 영어에 대한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는 “돌이켜보면 영어가 진로 선택의 폭을 넓히고 좋은 기회를 잡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만 해도 영어를 잘 못했다고 한다. 고등학교 때 영어실력에 따라 A, B, C반으로 나누어 수업을 했는데 항상 C반이었다고 한다.

그는 “하지만 고2 겨울방학 때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영어책을 붙잡고 무작정 읽었다.”고 했다. 한동안 그러고 나니 영어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는 “지금도 5형식이나 시제 같은 문법은 잘 모른다. 영어시험 볼 때도 그냥 느낌으로 자연스러운 답을 고르는 거지, 왜 문법적으로 맞고 틀리는 지 잘 모른다. 그래도 나름 영어가 삶을 풀어나가는 데 큰 도움이 되었으니 결과론적으로 그것이 효율적인 학습방법이 아니었나 싶다.”고 말했다. 

앞으로 그의 계획은 무얼까?

그는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계획과는 다르게 전개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말했다. 그는 “그래서 굳이 예측하지 않으려 한다. 그냥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그 때 그 때 상황에 따라 목표를 수정하며 충실히 살아간다면 나중에 후회하지 않는 삶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후배들에게 한 마디 조언을 해달라고 했다.

그는 “흔히들 하는 얘기지만 세상에 정답은 없고 모든 것은 각기 제 역할이 있다.”고 말했다. 무슨 말일까? 남들이 가는 길이라고 다 따라가지 말자, 나는 나만의 색깔이 있다, 이런 뜻과도 연결되는 말이겠다.

그는 “부경대는 부경대만의 특징과 강점이 있다. 그러한 특징을 잘 살려 강점을 연마하는 것이 경쟁력을 키우는 가장 좋은 길이라고 생각된다.”면서, “후배들의 건투를 응원한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부경투데이>

His extraordinary challenge of being a 'public servant + the US lawyer + a leader of international organizations'
Jo Il-hwan, Alumnus of Marine Bio-Materials and Aquaculture, Enrolled in 1989 (Head chief, Fisheries policy division at the Ministry of Oceans and Fisheries)

He is a civil servant in Korea, a lawyer in New York State, and is also vice chairman of the Fisheries Committee of the Organization for Economic Cooperation and Development (OECD), which leads global economic cooperation.

This is the story of Jo Il-hwan (photo), an alumnus of Pukyong National University. He is a head chief of Fisheries policy division at the Ministry of Oceans and Fisheries (MOF), and he graduated (enrolled in 1986) department of Aquaculture Technology, now Marine Bio-Materials and Aquaculture at Pukyong National University,

How did he come up to this position? For those who want to get a hint in his life, Pukyong Today has sent e-mails to him and interviewed.

In fact, he is a very busy person, so this kind of little interview (not so much of a touch to himself) would be annoying. But he spent the goldmine of time at the request of Pukyong Today for "For the school juniors!" (If we say, 'for juniors', why do so many alumni get weak-minded? ^^)

He broke the silence and say, "Actually, I did not think of my present at all in the first grade of university."

He said, "If I look back about 30 years since my admission to college, it seems like I have been living on changing my goals according to the situation at that time, rather than running toward the goal." So he said, "I think this is the wonderful aspect of life."

"As Steve Jobs told us about his graduation from Stanford University, I look back and I think the moments of the past are all connected and meaningful." Mr.Jo said. Now is the sum of the past! Now, your moment (what you are doing!) will be your future.
   
How was his university life?

Mr.Jo said, "Literally, I lived in a university fish farm for 4 years, only working." This fish farm is still the fish farm behind the bamboo grove at the school main gate.

"The situation has changed a lot now, but at that time, the students were totally in charge of fish farms and raised fish," he said. "It was a situation that we had to do fish farm work and study, but it seemed to be a good opportunity to cherish the time we could study," he said. (This positive mind!)

Mr.Jo said, "I could not afford to do other club activities, but the strong relationship between my accumulated experience and patience, Professor Kim In-bae, Professor Jo Jae-yoon, and other senior and junior colleagues is an enormous, asset in my life."

How did he become a civil servant who worked so hard in the school fish farm?

Mr.Jo said, "I originally wanted to stay in school or go to the institute. But first of all, I wanted to be economically independent, so decided to prepare the work."

He said, "There were some people who encouraged civil servants in the neighborhood, but as many people had, there was a prejudice that public officials are stereotyped, and private businesses were not attracted to work, so I decided to work in public enterprises."

At the moment, Rural Development Administration changed its name to Rural Community Corporation and it selected 5 fisheries office workers, so he joined the company as one of them.

He worked there to establish a comprehensive development plan for fishing villages in Jeonnam area. However, when I was working, I felt that public officials were more at the decision stage.

So he wanted to play a more leading role in the process of pushing ahead what he thought he was at that time. I do not know that there is a fisheries technology examinations, and he attended Rural Community Corporation and prepared for the exam, and in his words, "I passed it luckily."

He said since his job was stable, he thought he wanted to do more studies that he had put off. The first department of the Ministry of Oceans and Fisheries was Marine Environment Division.

"The field of marine environment is somewhat unfamiliar, but it's a very exciting field," he said. "So I went to a school where I could study more towards the marine environment. After entering the Marine Environment Department at the Duke University Graduate School of Environment, he became interested in remote sensing using GIS and satellites and changed his major to environmental ecology.

At this point, readers will find that one of the things that changed his life was 'English'.

He obtained his master's degree from Duke University in the United States and returned to the Ministry of Oceans and Fisheries in 2001.

"At that time, I thought I would be placed in the marine environment," he said. "But at the time, however, the WTO Doha Development Agenda negotiations became an issue, and because of the need for English-speaking staff, I was placed in the Trade Promotion Section and was in charge of WTO negotiations.", he said. This moment is one of the inflection points of his life.

"The trade negotiations were fun," he said. He went to the WTO headquarters in Geneva, Switzerland, almost every month to negotiate. In the process, he finds one interesting point. Among the foreign negotiating groups, especially the representatives of a Western country negotiations, there were many who majored in law.

"At that time, I felt that the people who majored in law were more logical and persuasive. I thought that I would have to study the law in order to do the trade negotiations well."

So he goes back to study at the Law School of Indiana University in 2004. He chose this law because it operated the most systematic Chinese law program among American law schools. "I did not study Chinese law but I thought I should know China from this point on.", he said.

How was 3 years of Cho's law school, where he had to study law in English for the first time?

"It was a very tough process," he recalls, "Now I think that I got a lot of guts to study law in English without knowledge or experience of it." It is a past, so roughly summed up in a few lines like this, but how could you have done it if it was not a severe endurance and hard work?
 
Having passed through many difficulties, he received his Doctor of Law (JD) and Doctor of Jurisprudence (JD) degrees. In the United States, graduating from law school, you can also take a lawyer examination in another state. As a result, he got a lawyer in New York State.

After returning to Korea in 2007, he worked in the fisheries policy business while working on trade related to the WTO and FTA. In 2013, he joined the presidential transition committee and worked on the national agenda for fisheries.

If we work in public office, we could have opportunities to go abroad as a resident employee. He says he wanted to go to the United States. However, he studied both Master and Doctor in the United States, and he thought that if work in United States, he would be too much on one side and he thought he should know a little bit about China, which is rising as a G2. He studied Chinese and went to China for the second half of 2013.

He said, "I suffered a lot due to the fine dust on the continent that is not comparable to Korea, but my life in China has also been a good experience. Especially, it is a big income to know the way of thinking and values of Chinese people similar to ours but much different."

Such Mr.Joe became Vice Chairman of the OECD Fisheries Committee in November 2018.

Professor Park Seong-kwae (2000~2002), Professor Lee Sang-go (2008 ~ 2011) of Marine Business and Economics served as Vice Chairmen of this committee.

How did Mr.Jo connect with the OECD?

He said, "About a decade ago, I learned that Professor Lee Sang-go of Pukyong National University is working as Vice Chairman of the OECD Fisheries Committee, and I had the idea that I should try it if I get a chance to do.", and added, "Finally an opportunity came to me in 2018, I became an OECD Fisheries Committee Vice Chairman"

He said he learned about the OECD Fisheries Committee during the WTO negotiations. The OECD is a kind of policy brain that collects and analyzes data from all over the world and writes reports. In the WTO fisheries sector negotiations, the OECD report is used as a major argument.

What is the issue of the OECD Fisheries Committee that he is currently serving as vice-chairman?

"There are discussions about the impact of fisheries subsidies on fisheries resources, illegal fishing prevention and the marine economy," he said. He is the vice chairman of the fisheries committee and his role is to coordinate and lead the discussion in advance with chairperson.

"Participation in OECD meetings is a good opportunity to learn about the experiences and policies of developed countries, and the policies discussed in the OECD will have a major impact on our fisheries. I think it is a great honor for me personally to be a vice-chairman of the OECD Fisheries Committee, and it is also very important for my country.", he said.

English is essential for these activities. Let's hear his story about English.

He said, "Looking backward, English seems to have played a very important role in broadening career choices and creating good opportunities."

He said he did not speak English well until the second grade of high school. In high school, The classes were divided into A, B, and C according to student's English proficiency but he was class C all the time.

He said, "But I thought that I should do something for my English during the winter vacation. I grabbed my English book and read it." He said, after doing this for a while, he could read English.

"I still do not know the grammatical forms like 5 types or tenses. When I look at the English test, I just pick the answer that is natural with the feeling, I do not know why it is grammatically correct and wrong. However, since my English helped me to get out of my life, I would like to conclude that it was an effective way of learning.", he said.

What are his plans for the future?

"It is very likely that it will develop unlike the plan as it has been so far." he said. “Therefore, I do not want to predict. Just as it has been so far, I think that if I change my goals according to the situation and live faithfully, I will not regret it later."

I asked him to give a word of advice to his school juniors.

"It's a common thing to say, but there is no right answer in the world, and everything has its part", he said. What does it mean? Let 's not go along with everyone else's way, I have my own color, which is also connected to this meaning.

He said, "Pukyong National University has unique characteristics and strengths. I think that it is the best way to enhance competitiveness by cultivating strengths by taking advantage of those characteristics." and he did not forget to say, "I support cheerfulness of school juniors." <Pukyong Today>